동경고이와성산교회
 
 
 
2019/10/03
사무엘하 강해 (11) 영적인 눈과 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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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예수
Subject     사무엘하 강해 (8)
성경:삼하6:12-23절,         제목: 여호와께 심취하자.
설교:김 병철 목사, 일시:2019년 9월 8일(주일 날 설교)
  서  론: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은혜의 말씀에 제목은“여호와께 심취하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기를 소원합니다. 이 말씀을 읽고 듣고 보는 가운데 성령 하나님의 폭포수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 심령 가운데 넘쳐나시기를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글이 생각나서 소개합니다.“미국의 한 하의원이 심한 병에 걸렸습니다. 그에게 의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만일 당신이 활동을 계속한다면 약 60일 정도 살 수 있을 것이지만 은퇴하신다면 아마도 몇 년은 더 사실 수 있을 것입니다.”이 말을 들은 이 하의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나는 60일을 선택하겠습니다. 나는 무익하게 더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그는 두 달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삶의 순간, 순간을 마지막을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모셨던 가정이 복을 받았습니다. (12절) 매년 설을 맞아 서로 세배를 하며‘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를 나눕니다. 주로 건강, 물질, 권력, 명예 같은 구체적인 것들을 많이 누리라는 뜻일 것입니다. 구약의 복은 대체로 이러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팔복에서 말씀하시는 복은 사뭇 다릅니다. 소유의 복이 아니라 존재의 복이다. 다시 말해 성품의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 이전에 복 받을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과 기독교의 축복은 다르다. 행복(happiness)은‘우연히 일어나다(happen)’에서 온 말입니다. 반면‘축복(blessing)’은‘피를 흘리다(bleed)’에서 나왔습니다. 축복은 우연히 주어지는 게 아니라 대가가 지불된 것입니다. 축복을 원하면서도 희생적인 대가를 생각지 않으면 요행을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축복은 예수님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행복보다는 축복을 구하시기를 바라고, 성품의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오벧에돔은 하나님의 궤를 모시므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 가정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벧에돔이 하나님의 궤를 삼개월간 모시는데 있어서 희생이 따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웃사가 하나님의 법궤를 만졌다가 하나님과 충돌하므로 인하여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법궤가 다른 곳이 아닌 오벧에돔의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오벧에돔이 자원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궤를 자신의 집으로 모셨을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모시는 것을 꺼려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잘못 모시다가는 복은 고사하고 혹이라도 저주를 받을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잘 못하다가 웃사처럼 그 자리에서 죽음을 면치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결국 오벧에돔에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강압적이든 자발적이든 간에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에 집으로 들어왔는데 이 궤가 얼마나 오랫동안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1년을 머물지 아니면 3년을 머물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오벧에돔은 얼마나 두렵고, 떨렸겠습니까?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나온 것이 없습니다. 오벧에돔이 하나님의 궤를 얼마나 정성껏 섬겼는지에 대해서 나오지 않습니다. 어째든 그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 경외하는 심정으로 섬겼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는 다른 이야기는 없고, 오벧에돔이 복을 받은 이유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하기를 오벧에돔의 집에 하나님의 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깐 오벧에돔의 집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다는 그 이유하나만으로 그는 복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성경에 또 나옵니다. 요셉의 경우입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가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인하여 보디발의 그 모든 소유에 복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보디발의 집은 요셉으로 인하여 복을 받은 것입니다. 창세기39:5절“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고 했습니다.  

  옛말의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복덩어리가 굴러 들어왔다고 하잖아요. 가정에 며느리가 들어와서 가정의 분위기가 바뀌고, 가정의 대소사한 일들이 잘 풀리면 어른들은 이 집에 복덩어리가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회사에 사원 한명이 들어오더니, 회사가 매출이 오르기 시작합니다. 사원 한 사람이 좋은 아이디어를 내면서 회사가 갑작스럽게 상장회사로 탈바꿈하게 되었을 때에 엄청나게 그 사람의 주가가 올라가게 되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사람 한 사람으로 인하여 교회 분위기가 바뀌고, 믿음의 사람으로 인하여 영적흐름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세상 이야기를 했던 모임에서 기도하고, 전도하며, 은혜 받는 일에 힘쓰며, 전도하고, 훈련받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분위기, 영적흐름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 되어서 축복의 전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가정, 교회도 이와 같은 축복의 전달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여호와의 궤를 모시는 사람, 가정, 교회, 사회, 국가가 이와 같은 축복받고, 또한 축복의 전달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함께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까? 경영하는 회사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십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그 증거가 있습니까? 그 증거는 무엇입니까? 요셉의 경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함을 보디발이 보았다고 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우리를 볼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는가? 생각해 봅시다.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해 춤을 추웠습니다. (13-15절)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해 춤을 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기뻐함의 표현, 즐거움, 행복함, 최선, 최고, 경배, 찬양, 기도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윗이 하나님의 궤 앞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 예배 속에 위에서 열거했던 이 모든 것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배할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즐겁고, 기쁩니다. 물론 부담감도 있기는 하지만 그 부담감은 잠깐이고 감사와 감격 그리고 즐거움이 훨씬 더 크게 마음에 와 닫는 사실입니다. 힘껏 춤을 춘다는 의미 최선을 다하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찬양을 부를 때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부르고, 기도를 드릴 때에도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드리며, 예배를 드릴 때에도 이렇게 신중하게 최선을 다해 예배를 드린다면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여러분들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말씀을 전하는 부족한 종도‘오늘 설교가 저에게는 마지막 설교이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설교하려고 늘 노력합니다. 그렇게 하니깐 매사 힘쓰고, 애쓰면서 설교에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매주 설교는 어떻게 보면 대중인 여러분들에게 설교를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 설교가 저 자신에게 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담대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도들이 상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설교를 여러 성도님들과 개개인에게 설교를 다 맞출 수도 없을뿐더러 맞춘다고 하더라도 설교가 어느 특정 개인에게 설교를 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수 많고, 죄인 중에 괴수, 목사인 저에게 맞추어 설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정말 우리들에게 시시 하는 바가 큽니다.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다윗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으로 말하면 예배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심취했으면 자신의 옷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자신의 하체가 들어나는 것도 모른 체 춤을 출수 있었겠습니까? 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함은 다윗이 그만큼 최선을 다해 앞에서 춤을 추었다. 경배했다. 예배했다. 찬양했다. 기도를 드렸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4-5일 오랫동안 부흥회를 개최합니다. 많은 성도들은 그 부흥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준비하여서 집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기도를 하다보면 어떤 사람들은 눈물이 범벅이 되어서 눈에 아이라인이 지워지면서 얼굴이 귀신처럼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콧물이 길게 늘어지고, 훌쩍하면 들어가며...정말 가관도 아닙니다. 기도할 때에 은혜 받을 때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부어주시는 대로 받는 것입니다. 체면 생각하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환경을 고려하면서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고, 찬양하며 우는지 그럴 때는 오히려 그 분들의 얼굴이 이쁘더라구요. 흉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은혜가 있으면, 모든 것이 은혜로 보여지고, 은혜로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 받는 일에 심취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에 심취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할 때에도 심취해야 합니다. 음식을 만들더라도 우리 주님께서 드시는 것이라 생각하고 정성을 다해 심취하면서 만들어야 합니다. 심지어 설거지를 하든지, 집안 청소를 해도 심취해야 합니다. 구두를 만들고, 반지 하나를 만들더라도 심취해야 합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 이것 했다가, 저것 했다가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노래와 반주를 해도 그 음과 그 가사에 심취해야 하며, 주일학교 교사를 해도 그 교사로써 어린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아이들에게 심취해야 합니다. 설교를 해도 설교에 심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궤 앞에서 너무나 기뻐 뛰면 춤을 추었는데, 그의 하체가 들어났다고 사울의 딸 미갈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궤 앞에서 다윗이 얼마나 기뻐 뛰며 심취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현재 저와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과연 그 맡겨진 일에 나는 심취해 있습니까?

  다윗의 신앙고백을 업신여겼던 미갈입니다. (16,23절) 미갈이 왜! 다윗을 업신여겼을까? 다윗이 하나님의 궤가 들어올 때에 왕의 체통을 지키지 않고, 철부지 같이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여자들 앞에서 춤을 추며, 자신의 몸이 들어나도록 행동한 그 철부지 같은 모습은 도저히 미갈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갈은 평생 살면서 권위주의 사로잡혀 살았던 자신의 아버지 사울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다윗의 이와 같은 행동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평생 살면서 법궤에 대한 이야기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성전, 법궤, 제사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했던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미갈은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미루어볼 때에 미갈 역시 신앙적이 않았고, 하나님의 법궤 또한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를 않았던 사람이었음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본문 16절을 읽어 봅시다.“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미갈을 소개할 때에 보통 다윗의 아내라고 하지 않고, 사울의 딸 미갈이라고 하는 것도 어쩌면 이런 연유에서 쓴 것으로 보여 집니다.  

  미갈은 다윗 왕이‘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자기 자신의 신앙고백을 한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미갈이 심중에 업신여겼다는 말입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시사 하는바가 대단히 큰 대목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치 잘 못하면 사람들을 한부로 판단하고, 제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믿음이 있다고 하는 분들이 자주 범하는 죄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상대방이 여호와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을 보고는 심중에 업신여기는 것이지요. 그 사람은 그것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에 너무나 어리석어 보일 때, 값없이 보일 때에 한부로 판단하지요. 그것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옳지 못한 행동입니다. 너희가 판단하므로 하나님 앞에서 판단을 받는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미갈이 다윗의 신앙고백을 보면서 그를 업신여겼다고 했잖아요. 그 이후로 미갈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책망을 받았습니까? 23절에“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무섭고, 두렵지 않습니까? 타인의 신앙을 한 부러 우리가 제단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가 아닙니까? 또한 어린 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주님 앞에 나오기를 주님께서는 원하십니다. 내가 왕이니깐? 내가 대통령이니깐? 내가 모 그룹의 회장, 사장이니깐? 대학총장, 대학교수이니깐, 갑부이니깐? 이런 것은 세상에서 사람들 앞에서나 내세울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세상 자랑은 내세울 것이 못됩니다. 내 세울 수도 없는 허접한 것들인 것입니다. 천국 갈 때에 불타 없어질 것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권위의식을 가지고 나오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우리들의 그 높고자 하는 자세부터 깨뜨리시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어린 아이처럼 주님이 말씀하시면 액면 그대로 순종하겠다고 하는 마음으로 나오는 자세를 주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너무나 유치하게 보일수도 있습니다. 미련하게 보일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자신들은 굉장한 지식을 소유하고, 경험이 풍부하며, 상당히 교양이 있는 존재로 여기고 마치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지몽매한 자들로 여길 법도 합니다. 왜냐하면 눈에 뭔가 보여야 믿는데 보이지 않는 분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웃기게 보일 것입니다. 세상 안 믿는 자들은 믿는 우리가 참으로 어리석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은 보이는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저는 보이는 하나님이라면 믿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사람들은 보이는 신을 추구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주에 강사님을 모시고, (雷門)카미나리몬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작은 불쌍 앞에서 정성껏 절하는 모습을 보고 저희들도 가서 보았습니다. 그곳은 그 불쌍 앞에서 절하면, 시주하면 교통사고로부터 아무튼 모든 것이 잘 되는 만사형통의 복이 적혀있더군요. 이처럼 보이는 신을 사람들은 추구합니다. 어리석은 것이지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21절“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안에서 된 일이기 때문이기에 사람의 지혜, 세상의 경험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하는 말씀 선포, 전도를 통하여 믿는 자들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타인의 신앙을 한 부러, 판단하거나 제단하지 맙시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분명이 있었을 것이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현대인들은 나와 다르면 틀리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다고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타인의 생각이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면 독특하게 볼 수 있지만, 틀리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판단, 제단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판단하려 하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잊지 맙시다. 그 또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셔서 살려주신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판단하는 일은 주님께 맡기고 우리들은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는 받아드는 훈련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을 경외하고 높이면서 자기 자신이 낮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20-22절) 본문을 보면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왔는데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얼마나 수고하셨냐고, 많이 힘들었을 텐데. 옷을 받아주면서 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하기를“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고 말을 했습니다. 비꼬듯이 말을 하면서 왕이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어떻게 여자들 앞에서 그의 몸을 들어낼 수 있습니까? 한심하다는 것입니다. 왕이 그 체면이 어떻게 되느냐? 그런 것입니다. 그때에 그 말을 듣고 다윗이 미갈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고 했습니다. 다윗도 굉장히 분노하면서 아주 과격하게 말을 합니다. 이후에 미갈의 대한 내용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다윗의 양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있고,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아무리 화가 나도 아내의 집안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라는 말입니다. 미갈에게 엄청난 상처이지요. 미갈은 사울과 세 오빠들에 대한 상처 깊이 남아 있었을 텐데 화가 난다고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싸움을 해도 절대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회사생활에서도 해서는 말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흔히 이런 말이 있잖아요. 홧김에 한 말이 나중에는 자신에게 비수가 되어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부부, 부모, 자식, 성도들에게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해야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자신이 춤을 춘 것은 여인들 앞에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다. 그리고‘여인들 앞에서 내가 더 낮아진들 나는 괜찮다. 오히려 그 여인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높여줄 것이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과 자신은 낮아지고, 어려움을 처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면 된다는 식의 신앙고백입니다.  

  세례요한는 말하기를“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한3:28-30) 세례요한은 자신은 아무렇게나 되어도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예수님은 흥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례요한이 아무렇게나 되었나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11:11절“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칭찬이셨습니다. 믿습니까?

  말씀을 맺기를 원합니다. 오벧에돔은 여호와의 궤를 모시므로 복을 받았습니다. 개인과 가정과 교회 사회 그리고 국가에 여호와 하나님의 기독교 정신이 자리잡혀서 복을 누리기를 소원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다윗과 같은 신앙되기를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타인의 신앙을 한 부러 판단하거나 제단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 합시다. 판단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판다는 하는 그 사람 또한 예수님의 핏 값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자녀임을 또한 잊지 맙시다. 마지막을 자신을 낮추되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여 사용하시는 성산의 가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2절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しかしダビデ王は、「主が神の箱のゆえに、オベデエドムの家とそのすべての所有を祝福されている」と聞き、ダビデは行って、喜びをもって、神の箱をオベデエドムの家からダビデの町にかき上った。
13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主の箱をかく者が六歩進んだ時、ダビデは牛と肥えた物を犠牲としてささげた。
14절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そしてダビデは力をきわめて、主の箱の前で踊った。その時ダビデは亜麻布のエポデをつけていた。
15절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こうしてダビデとイスラエルの全家とは、喜びの叫びと角笛の音をもって、神の箱をかき上った。
16절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主の箱がダビデの町にはいった時、サウルの娘ミカルは窓からながめ、ダビデ王が主の前に舞い踊るのを見て、心のうちにダビデをさげすんだ。
17절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人々は主の箱をかき入れて、ダビデがそのために張った天幕の中のその場所に置いた。そしてダビデは燔祭と酬恩祭を主の前にささげた。
18절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ダビデは燔祭と酬恩祭をささげ終った時、万軍の主の名によって民を祝福した。
19절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そしてすべての民、イスラエルの全民衆に、男にも女にも、おのおのパンの菓子一個、肉一きれ、ほしぶどう一かたまりを分け与えた。こうして民はみなおのおのその家に帰った。
20절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ダビデが家族を祝福しようとして帰ってきた時、サウルの娘ミカルはダビデを出迎えて言った、「きょうイスラエルの王はなんと威厳のあったことでしょう。いたずら者が、恥も知らず、その身を現すように、きょう家来たちのはしためらの前に自分の身を現されました」。
21절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ダビデはミカルに言った、「あなたの父よりも、またその全家よりも、むしろわたしを選んで、主の民イスラエルの君とせられた主の前に踊ったのだ。わたしはまた主の前に踊るであろう。
22절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わたしはこれよりももっと軽んじられるようにしよう。そしてあなたの目には卑しめられるであろう。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さきに言った、はしためたちに誉を得るであろう」。
23절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こうしてサウルの娘ミカルは死ぬ日まで子供がなかった。
Date : 2019-09-13 11:56:32    Read :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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